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토니오 카르바할 (문단 편집) === 선수 생활 === 원래 카르바할이 뛰고 싶어하던 클럽은 [[클럽 아메리카]]였지만 아메리카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고[* 당시에 뛰던 선수 중 클럽 아메리카 명예의 전당에 올라간 골키퍼가 없다. 즉 당시 골키퍼 중에는 카르바할의 적수가 될 만한 골키퍼가 없었다는 이야기] 대신 에스파냐와 계약을 했다.[* 클럽 에스파냐 역시 1944-45 시즌에는 멕시코 리그에서 우승할 정도로 나름 잘 나갔던 클럽이고, [[호세 마누엘 모레노]]가 1944년부터 2차 대전 종전시기까지 잠시 뛰기도 했던 클럽이다. 이 시기에 그는 멕시코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고, 그의 유명한 별명인 기병-el charro을 얻은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.] 처음부터 싹이 보였던 터라 [[1948 런던 올림픽|1948년 올림픽]]에도 대표팀에 차출되었다. 그런데... 카르바할의 기나긴 그리고 불운의 국제 대회 커리어의 전주곡은 이때부터 시작 되었다. 비록 카르바할이 골문을 지키지는 않았지만 멕시코는 [[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|대한민국]]에게 5대 3으로 패배하고 한 경기 만에 짐을 싸게 되었다.[* 이 승리가 대한민국의 첫 국제 대회에서의 승리였다. 흔히들 정부 수립 이후 첫 승리로 알고 있지만, 런던 올림픽이 페막되고 다음 날인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수립되었다.] 이후에 클럽 에스파냐에 돌아온 카르바할은 다시금 기량을 끌어올려서 북중미 최고의 골키퍼로 명성을 떨쳤고 소속팀 클럽 에스파냐를 리그 4위에 올려놓는 공헌을 했다. 그리고 [[1950 FIFA 월드컵 브라질|1950년 월드컵]]에 출전하여 첫 월드컵에 출전하는 동시에 A매치 데뷔전도 치르게 된다. A매치 데뷔전의 상대는 호스트 [[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|브라질]].[* 공교롭게도 이 대회는 2차 대전 이후의 첫 월드컵 경기, 즉 개막전이었다] 카르바할은 분전했지만 [[아데미르]]에게만 2골을 허용하면서 팀은 4대 0으로 셧아웃당하고 말았다. 나머지 2경기도 다를 바 없어서 [[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|유고슬라비아]]에게는 4대 1, [[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|스위스]]에게는 2대 1로 패하면서 3패의 성적표만 받고 쓸쓸히 멕시코로 돌아와야 했다. 멕시코에 돌아와서는 더욱 황당한 일을 당했는데 소속팀 클럽 에스파냐가 멕시코 축구협회와의 견해 차이로 인해 리그에서 축출당하고 뒤이어 공중분해 된 것. 카르바할은 이로 인해 소속팀을 레온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. 레온으로 이적하고 나서 카르바할은 첫 리그 우승의 감격을 맛보았다. 1951-52 시즌에 과달라하라를 승점 1점 차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한 것. 그리고 이듬해에는 코파 멕시코 결승전까지 진출하는 등 클럽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갔다.[* 결과는 푸에블라에게 4대 1로 대패했다.] 그 여세를 몰아 [[1954 FIFA 월드컵 스위스|스위스에서 열린 두 번째 월드컵]]에 참가했지만 개막전의 상대가 또 [[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|브라질]]이었고 이번에는 전보다 더 크게 5대 0으로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. 뒤이은 [[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|프랑스]]와의 경기에서는 3대 2로 아쉽게 패배하고 말았다. 후반 막판에 [[레몽 코파]]에게 [[페널티 킥]] 득점을 허용한 것이 아쉬웠다. 결국 [[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|멕시코]]는 이번에도 2패만을 안고 멕시코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. 레온에서는 1956년에 다시 멕시코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이듬해인 1956-57시즌의 코파 멕시코에서는 준우승, 1957-58시즌에서는 결승에서 다시 자카테페크를 만나 5대 2로 복수에 성공[* 이전 코파 멕시코에서는 자카테페크에게 2대 1로 패배하여 준우승을 차지했었다], 코파 멕시코 우승을 차지하는 등 이 때가 카르바할 클럽 커리어의 최고 전성기였다. 다시금 나간 [[1958 FIFA 월드컵 스웨덴|월드컵]]. 이 때부터 카르바할은 [[주장]]으로 출전했다. 첫 경기에서는 호스트 [[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|스웨덴]]을 만나 3대 0으로 패배했다. 뒤이은 [[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|웨일스]]와의 경기에서는 후반 44분에 터진 벨몬테의 동점골에 힘입어 카르바할의 월드컵 커리어 사상 처음으로 승점을 따는데 성공했다. 마지막 상대는 [[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|헝가리]]. 비록 헝가리가 4년 전의 포스를 내뿜던 팀은 아니었지만 멕시코에게는 버거운 상대였고 4대 0으로 대패하고 말았다. 이후의 카르바할의 클럽 커리어는 [[콩라인]]의 연속. 우승은 못 맛보고 계속 2위 언저리에서만 놀았다. 그러다 참가한 4번째 월드컵. 이번에는 [[1962 FIFA 월드컵 칠레|칠레]]였다. 칠레에서의 첫 상대도 다시 한 번 [[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|브라질]]이었고, 이번에는 [[펠레]]에게 1골 1어시스트를 허용하며 2대 0으로 무너지고 말았다. 뒤이은 [[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|스페인]]과의 경기에서는 경기 종료 직전에 결승골을 허용하여 1대 0으로 아깝게 패배하고 말았다. 마지막 상대는 [[체코 축구 국가대표팀|체코슬로바키아]]였는데 이 경기에서 멕시코는 경기 시작 15초 만에 마세크에게 골을 허용했지만[* 이것이 [[2002 FIFA 월드컵 한국·일본|2002년 월드컵]] [[히딩크호/터키전|3·4위 전]]에서 11초 만에 골을 허용하기 이전의 월드컵에서 기록된 가장 빠른 골 기록이었다] 3골을 넣으며 결국 32년 만에 월드컵에서 첫 승리를 따내었다.[* 그리고 이 날은 카르바할의 33번째 [[생일]]이었다.]. 멕시코는 조 3위로 [[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|스페인]]을 제치고 월드컵 역사상 가장 높은 순위로 대회를 마감하는 성과를 거두었다. 1965년부터는 노쇠화로 인해 조금씩 기량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점차 레온에서 카르바할의 존재는 희미해져갔다. 결국 1965-66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카르바할은 마지막으로 [[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|1966년 월드컵 대회]]에 참가함으로서 최초로 월드컵에 5회 참가한 선수라는 기록을 세웠다.[* 현재까지 월드컵에 5회 출전한 선수는 [[독일 축구 국가대표팀|독일]]의 [[로타어 마테우스]]와 [[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|이탈리아]]의 [[잔루이지 부폰]], [[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|멕시코]]의 [[라파엘 마르케스]] [[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|아르헨티나]]의 [[리오넬 메시]], [[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|포르투갈]]의 [[크리스티아누 호날두]] 이렇게 6명이 있다. 물론 카르바할의 기록이 역사상 최초이다.] 이전과는 다르게 처음 두 경기에서 카르바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. 하지만 마지막 경기인 [[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|우루과이]]와의 경기에 선발 출장하였다. 이 경기에서 이기면 멕시코는 사상 최초의 2라운드 진출을 할 수 있었다. 아쉽게도 경기는 0대 0 무승부로 끝났고, 카르바할의 월드컵 도전기도 그렇게 막을 내렸다. 이 경기는 우루과이의 골키퍼 [[라디슬라오 마주르키에비츠]]와의 세이브 대결이 돋보였고 우루과이의 공격수 [[페드로 로차]]의 근거리 다이빙 헤딩을 세이브해내는 장면은 카르바할이 아직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